경북 칠곡 가볼만한곳 베스트10
안녕하세요? 이번 포스팅에서 소개드릴 내용은 경북 칠곡 가볼만한 곳 베스트10에 대한 내용입니다.
아래 순위는 한국관광공사의 인기도 순위를 참고하여 추천드리는 내용입니다.
참고하시고 즐거운 여행 하시길 바랍니다.
칠곡 가산산성 및 가산바위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칠곡 가산산성 및 가산바위 소개
산골짜기를 이용하여 쌓은 석성(石城)으로, 조선 인조 18년(1640)에 축조되었습니다.
가산산성이 있는 곳은 신라시대 오악신앙(五岳信仰)의 중심인 명산 팔공산 정상에서 서쪽으로 약 10km 떨어진 해발 901m의 가산은 일곱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일명 칠봉산으로 불리는 명산입니다.
산정에 나지막한 7개의 봉우리로 둘러싸인 평지가 있고 여기서 사방으로 7개의 골짜기가 뻗어나가고 있습니다.
임진, 병자 양란을 겪고 난 후 조선 중기에 전략적 방어를 위하여 약 100여 년간에 걸쳐 축성했습니다.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성을 쌓는 선 후기 건축기법을 잘 보여주는 산성으로 내,외,중성 구조로 이루어진 국내 유일의 3중성입니다.
성내에는 칠곡도호부가 존재했으며, 객사·인화관(人和館)을 비롯한 관아와 군관청·군기고·보루·포루(砲樓)·장대(將臺) 등이 설치되었습니다.
정상에는 백여명이 앉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대구시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 좋은 휴식처인 가산바위가 있습니다.
가산바위는 일명 가암(架巖)이라고도 하는데 사면이 깎아지른 듯이 우뚝 솟아 있는 바위입니다.
상면에 80평 정도의 넓은 평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평지 동쪽에 큰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사방이 트여 있어 바위 위에 서면 남쪽으로 대구광역시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통일신라시대의 고승 도선(道詵)이 지기(地氣)를 잡으려고 바위 위 구멍 안에 쇠로 만든 소와 말의 형상을 묻었는데 조선시대 관찰사 이명웅(李命雄)이 성을 쌓으면서 없애버렸다는 전설이 전합니다.
[문화재 정보]
- 가산산성
지정연도 : 1974년 3월 26일
시대 : 조선
규모 : 면적 19만 4,436㎡, 외성(外城) 3,754보
중성 602보, 내성 4,710보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칠곡 가산산성 및 가산바위 기본 정보
홈페이지 칠곡군 문화관광 http://www.chilgok.go.kr/tour/main.do
문화재청 http://www.cha.go.kr
운영 시간 00:00~24:00
쉬는 날 연중개방
송림사(칠곡)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송림사(칠곡) 소개
팔공산 서쪽 끝자락에 자리한 송림사는 절 주위에 소나무가 울창하고 옆 계곡에 는 맑은 시냇물이 흐른다.
도로변 바로 옆에 위치해 있어 힘들게 산행하지 않아도 팔공산의 맑은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면서 휴식을 취할 수 있습니다.
송림사 동쪽으로는 신숭겸 등 고려 태조 왕건의 충신 8명을 추모하고자 이름 지어진 팔공산이 있습니다.
팔공산은 불교가 수용되면서부터 자연히 신라불교의 성지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으며, 불교문화를 꽃피운 영산입니다.
북쪽에는 일명 칠봉산(七峰山)으로 불리는 가산(架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7개의 봉이 7개의 골짜기를 이루어 칠곡(七谷)이라 한 것이 오늘의 칠곡(漆谷)이 되었으며, 1640년(인조 18년)에 이곳에 가산성을 쌓고 칠곡도호부의 치소가 약 180년간 산성 내에 있었습니다고 합니다.
송림사가 있는 마을을 송림이라 하는데, 송림사에서 유래되었습니다고 하며, 약 300년 전에 남평문씨가 정착했습니다고 전합니다.
칠곡군 동명면 소재지에서 동으로 약 2㎞ 지점에 위치하며, 원래 칠곡군 하북면 지역이나 1914년 구지동, 송림동, 덕산동, 양지동 일부를 병합하여 동명면에 편입되었습니다.
소나무 숲에서 절이 솟아낫다는 전설을 간직한 송림사(松林寺). 송림사는 나지막한 돌담이 둘러싸여 아담하고 옛스러운 멋을 풍기는 절 집과 탑, 석등 등이 아름드리 정원수와 잘 어우러져 마치 작은 공원의 안락함이 느껴진다.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눈에 띠는 것이 크고 우뚝하면서도 균형 잡힌 몸매를 뽐내는 오층전탑(五層塼塔)이 절의 가치를 한껏 높여주고 있습니다.
인근에 있는 부인사가 잃어버린 영광의 흔적이라면 송림사는 오로지 탑 하나로 현존하는 영광의 흔적입니다.
고려 현종 때 거란과 여진을 퇴치하기 위해 처음으로 대장경 각판사업을 진행한 것이 부인사에 보관되었던 초조고려대장경(初雕高麗大藏經)인데, 몽고의 2차 침략 때 몽고군이 부인사로 들이닥쳐 불태워 버렸다.
이어 송림사에 들이닥친 몽고군의 만행으로 모든 전각들이 불탔지만, 전탑만은 험한 수난 속에서도 꿋꿋이 이겨내고 오롯이 그 모습을 오늘날까지 지켜온 것입니다.
* 통일신라시대의 전탑, 송림사오층전탑 *
송림사 대웅전 앞에 서있는 5층 전탑(塼塔)으로, 흙으로 구운 벽돌을 이용해 쌓아 올렸다.
탑을 받치는 기단(基壇)은 벽돌이 아닌 화강암을 이용하여 1단으로 마련하였는데, 기단의 4면에는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습니다.
탑신(塔身)은 모두 벽돌로 쌓아올렸다.
2층 이상의 몸돌은 높이가 거의 줄어들지 않아 전체적으로 높아 보이나, 각 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이 넓은 편이어서 안정되고 온화하다.
지붕은 벽돌로 쌓은 점을 고려한 듯 밑면의 받침 부분 외에 위의 경사면까지 층급을 두어 쌓았습니다.
꼭대기에는 금동으로 만든 머리장식이 남아있는데, 이는1959년에 해체하여 복원 작업을 하면서 원형대로 모조한 것입니다.
비록 모조품이긴 하나, 통일신라시대 금동 상륜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됩니다.
9세기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되며, 보수를 하면서 탑신의 몸돌 내부에서 나무로 만든 불상과 사리장치 등이 발견되었습니다.
* 석탑과 유물의 가치에 대하여 *
신라 진흥왕 때 진(陳)의 사신 유사(劉使)가 중국 유학승인 명관대사(明觀大師)와 함께 신라에 오면서 불경 2,700권과 불사리를 이운해 왔다.
이때 불경과 불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지은 절로 그 가운데 일부를 호국안민(護國安民)을 위한 기원보탑에 봉안하였습니다고 합니다.
흔히들 한국은 석탑의 나라라고 이야기 할 정도로 탑이 많다.
그러나 순수한 전탑은 몇 기 되지 않아 탑의 상륜부 까지 오롯이 갖추고 있는 송림사 5층 전탑은 미술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희소가치 또한 높다.
탑의 겉모양뿐만 아니라 이 탑에서 나온 유물 역시 그 가치가 이루 말할 수 없는 데, 1959년 해체수리를 할 때 쏟아져 나온 사리엄구와 함께 여러 가지 유물들은 양과 질 모두를 만족시켰다.
그 중에서도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의 화려한 아름다움과 정교함은 어떤 표현으로도 모자랄 지경이어서 대구박물관의 입장권 전면에 새겨지기도 했습니다.
또 미국 매트로폴리탄 박물관에 대여되어 한국의 문화와 미술품을 알리는 메신저로서 유물의 가치를 인정받기도 했습니다.
* 송림사의 볼거리, 석탑과 다양한 유물 *
신라 진흥왕 때 진(陳)의 사신 유사(劉使)가 중국 유학승인 명관대사(明觀大師)와 함께 신라에 오면서 불경 2,700권과 불사리를 이운해 왔다.
이때 불경과 불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지은 절로 그 가운데 일부를 호국안민(護國安民)을 위한 기원보탑에 봉안하였습니다고 합니다.
흔히들 한국은 석탑의 나라라고 이야기 할 정도로 탑이 많다.
그러나 순수한 전탑은 몇 기 되지 않아 탑의 상륜부 까지 오롯이 갖추고 있는 송림사 5층 전탑은 미술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희소가치 또한 높다.
탑의 겉모양뿐만 아니라 이 탑에서 나온 유물 역시 그 가치가 이루 말할 수 없는 데, 1959년 해체수리를 할 때 쏟아져 나온 사리엄구와 함께 여러 가지 유물들은 양과 질 모두를 만족시켰다.
그 중에서도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의 화려한 아름다움과 정교함은 어떤 표현으로도 모자랄 지경이어서 대구박물관의 입장권 전면에 새겨지기도 했습니다.
또, 미국 매트로폴리탄 박물관에 대여되어 한국의 문화와 미술품을 알리는 메신저로서 유물의 가치를 인정받기도 했습니다.
* 소장 : 송림사 / 시대 : 통일신라 / 종류 : 전탑 / 크기 : 전체높이 16.13m, 기단폭7.3m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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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림사(칠곡) 기본 정보
신동입석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신동입석 소개
*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선돌, 신동입석 *
신동입석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선돌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것으로 높이가 4.5m, 밑둘레 2m이며 묘의 면적은 897㎡입니다.
이 선돌의 동쪽 주변을 개간할 때 민무늬토기[無文土器]와 돌도끼 등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청동기시대 고인돌[支石墓]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낙동강을 끼고 구릉지에 모여 살던 선사인들이 남긴 유물로 조상신을 숭배하거나 묘지를 표시하는 기능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선돌의 아랫부분에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후세 사람이 새긴 것입니다.
선돌의 중앙 부분에는 부러진
흔적이 있는데 원래는 현재의 윗부분도 부러져 셋으로 동강나 있는 것을 보수하여 세웠다.
* 청동기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입석 *
입석은 다른 말로 선돌이라고 부르는데, 고인돌과 함께 청동기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유물입니다.
일반적으로 땅 위에 한 개 또는 몇 개의 큰 돌기둥을 세운 형태를 하고 있는데, 당시 부족간의 경계표시 또는 신앙의 대상이 되는 기념비의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문화재 정보]
지정종목 : 시도기념물
지정번호 : 경북기념물
지정연도 : 1972년 12월 29일
시대 : 청동기시대
종류 : 고인돌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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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입석 기본 정보
도덕암(칠곡)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도덕암(칠곡) 소개
* 칠곡의 유명한 나한기도처, 도덕암(칠곡) *
팔공산은 대구, 영천, 경산, 칠곡, 군위 등 경북 중부를 아우르는 한국불교의 성산입니다.
때문에 팔공산 권역 내의 대부분의 사찰이 산명을 당연히 ‘팔공산’이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칠곡의 도덕암은 예외입니다.
분명 팔공산 도덕암이 분명할 터인데 도덕암은 독자적으로 사명에서 그 이름을 따 ‘도덕산(道德山) 도덕암(道德庵)’이라 지어 부르고 있습니다.
도덕암은 신라 눌지왕 대에 창건되었습니다고 하나 정확한 기록은 알 수 없고, 고려 광종 19년(968) 혜거국사(惠居國師)가 칠성암(七星庵)이라는 사명을 가지고 중수했습니다는 사적만이 남아있습니다.
훗날 조선 철종 4년 몽계스님에 의해 ‘도덕암’이라는 사명을 고쳐부르고 사명에 따라 도덕산이라고 바꿔 부르게 된 것입니다.
도덕암에는 조선 철종 13년에 그려진 몽계당 선의대사(夢溪堂 善誼大師)의 진영이 보관되어 있고, 조선 후기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16나한상이 나한전에 봉안되어 있는 것이 눈길을 모으고 있는데 현재 문화재 지정신청을 해놓은 상황이라고 합니다.
특히, 도덕암은 이 16나한상의 존재로 인해 칠곡에서는 유명한 나한기도처로 알려져 있습니다.
도덕암에서도 나한기도만을 올리는 신행단체인 ‘나한봉참회’가 운영되고 있습니다.
또한, 고려 광종이 이곳에 와서 도덕암(道德庵) 약수를 마시고 지병이 나았습니다는 일화가 전해오는 ‘어정수(御井水)‘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도덕암이 팔공산이 아닌 도덕산(道德山)에 자리한 것이라고 내세우는 ‘자존’은 ‘암자답지 않은’ 유구한 내력을 지니고 있음도 하거니와, 예부터 선지식을 많이 배출해 ‘도덕암’이라고 지었습니다는 연유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 도덕암의 설화 및 역사 *
도덕암은 신라 19대 눌지왕 대(417-458) 창건설이 알려져 있지만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고려 광종 19년(960)에 혜거국사(惠居國師)가 대중수하여 칠성암(七星庵)이라고 이름 붙였다는 사적이 전해온다.
당시 고려 광종은 혜거대사를 왕사로 모시려고 여러 번 사람을 보냈으나 번번히 거절당했습니다고 합니다.
그래서 광종이 친히 어가를 몰아 지금의 도덕암으로 와 왕사로 모실 것을 권했으나 또다시 거절당했습니다.
이에 광종이 돌아가려 하자 대사는 ‘이것도 속세의 인연’이라며 며칠간 쉬면서 속병을 고치시라 했습니다.
그래서 광종은 여기에서 3일간 쉬면서 절에 있던 샘물을 복용했더니 씻은 듯이 속병이 나았습니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 이 샘물을 ‘어정수(御井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고 하며 아직도 극락보전 뒤편에 샘물이 남아있습니다.
이 일로 광종은 절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아 이 절을 칠성암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후세사람들이 어정수를 약물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지금도 도덕암을 찾는 불자들은 으레 이 어정수를 꼭 복용합니다고 합니다.
도덕암의 이 후의 사적은 조선시대 이전까지 전하는 바가 없고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의 병화를 입고 광해군 12년(1620) 법거선자(法居禪子)가 중수했으며 인조 10년(1632)에 훈장선사(訓?禪師)가 나한전을 건립했습니다.
또 효종 4년(1653) 기성대사(箕城大師)가 중수했습니다고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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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암(칠곡) 기본 정보
주차시설 주차 가능
쉬는 날 연중무휴
영명사(칠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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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명사(칠곡) 소개
* 득남기도처로 유명한 사찰, 영명사 *
금오산 야트막한 터에 자리한 영명사는 한 개인의 이와 같은 발복의 의미로 세워진 사찰입니다.
발복이란 예부터 우리네 어머니들이 머리와 등에 공양물을 이고 져서 산 중 험한 길을 마다 않고 오로지 자식 잘되길 빌기 위해 절을 찾아들어 소원을 빌었던 것을 의미합니다.
즉, 발로 복을 얻습니다는 의미입니다.
1926년 창건한 영명사는 1935년 대웅전을 중수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고 요사 2동은 그 이후에 지었습니다.
현재 영명사는 이명렬 보살의 외손 명의로 되어 있어 운영과 불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아직은 초라한 인법당의 모습이지만 큰 욕심 내지 않고 조용한 수행 기도처로서 영명사의 제 역할을 충실히 이행해 나가고 있습니다.
* 영명사의 창건배경 및 설화 *
영명사는 1926년 인근에서 주막집을 하면서 어려운 이들을 돕고 신심있던 불자로 소문났던 이명렬(李明烈) 보살이 아들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창건, 스님을 시봉하며 여기에서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보살의 뜻과 달리 결국 득남을 하지 못하고 세상을 등지게 됐으나 아이러니하게도 현재의 영명사는 득남기도처로 유명해져 있습니다.
아무래도 영명사는 창건주의 발원이 부처님의 가피가 되어 득남 영험을 가지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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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명사(칠곡) 기본 정보
주차시설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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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둔사(칠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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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둔사(칠곡) 소개
* 신라 화랑들의 수행도량, 대둔사(칠곡) *
대둔사라는 같은 사명을 지닌 사찰이 흔치 않은데 경북 칠곡군 가산에도 같은 사명의 대둔사가 신라시대 고찰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며, 신라 화랑도들의 수행도량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창건 이후 사적이 알려져 있지 않다가 1840년(조선 헌종 6) 대홍수로 사역 전체가 물에 잠겼다.
1992년 다시 수해로 대웅전이 무너졌으나 1999년 다시 극락전을 세웠다.
지금은 선방인 심검당도 세워져 있습니다.
현재의 대둔사는 대웅전과 함께 선방인 심검당을 함께 지어 스님 10여 명이 정진에 여념이 없는 비구니 수행도량으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대둔사의 사명이 크게 싹을 틔운다는 뜻이니 이제 열매를 맺고 꽃을 피울 때까지 대둔사는 또다시 새로운 생명의 싹을 틔워낼 것입니다.
* 해남의 대둔사와 칠곡의 대둔사 *
전남 해남 지역을 지역을 가보면 유명한 거찰인 대둔산 대둔사를 만나볼 수 있습니다.
해남의 대둔사가 원래 크다는 뜻의 '한'에 '둥글다'거나, '덩어리'란 의미를 가진 '듬'이나 '둠'을 쓴 한듬, 한둠, 혹은 큰 대(大) 자를 쓴 ‘대듬사’ 또는 ‘한듬절’로 불리웠다.
칠곡 가산의 대둔사 역시 그렇게 불리워지지 않았나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증거로 이 사찰의 사하촌을 ‘한듬마을‘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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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둔사(칠곡) 기본 정보
주차시설 주차 가능
금곡사(칠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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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곡사(칠곡) 소개
오행 중 금(金)의 기운은 음극과 양극이 서로 잡아당기는 형국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음은 음대로의 방식으로 양은 양대로의 방식으로 살아가되 서로가 발전적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도록 합니다.
그러나 성질이 단단해 독재적일 수 있으나 반면 일사분란하게 추진하는 추진력도 가지고 있습니다고 합니다.
경북 칠곡의 금곡사(金谷寺)는 사명에서 보듯 왠지 이러한 기운과 닮아 있습니다.
신라 선덕왕대에 창건한 사찰로 창건 후 역사를 알 수 없으나 지금까지 고집스럽게 그 자리 만을 묵묵히 지켜온 외골수이면서 주변의 지세와도 잘 어울려 마치 암자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유유자적한 세월을 보내온 것처럼 집착과 번뇌를 놓아버린 듯 하다.
재미있는 것은 우연인지 필연인지 금곡사와 관련된 것들이 거의 금과 관련한 사실과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 많다.
먼저 금곡사가 자리한 곳이‘금화리(金華里)’입니다.
금곡사 아래에 자리한 커다란 저수지가 있는데 ‘금화저수지’라고 부르며 상류계곡을‘금화계곡’이라고 합니다.
이는 마을에서 약 3km 정도 떨어진 곳에 일제 때 광산이 한창 성했습니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또 금곡사의 주불이 서방정토에 계시는 극락전 아미타부처님인데 서쪽은 금의 방향이라고 하니 이 또한 깊은 관련성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창건주가 금란(金蘭)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인데 스님인지는 알 수 없으나 ‘금란’이란 ‘철석(鐵石)’ 같은 약속을 뜻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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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곡사(칠곡) 기본 정보
주차시설 주차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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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티 순교성지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한티 순교성지 소개
한티는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득명리에 위치한 해발 600m가 넘는 깊은 산골입니다.
을해박해(1815년)와 정해박해(1827년) 후에 감옥에 갇힌 신자들의 가족들이 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1860년 경신박해가 종결된 후 큰 교우촌이 되었으며, 이후 교우촌에 은거해 살던 신자들은 병인박해(1866~1871)로 다시 한번 수난을 겪게 되었습니다.
현재 무명 순교자들의 묘와 피정의 집, 대신학교 영성관, 순례자 성당 등이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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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티 순교성지 기본 정보
가실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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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실성당 소개
가실성당은 1895년에 조선 교구의 11번째 본당으로 초대본당신부는 파리외방선교회의 하경조 신부다.
본당의 넓은 관할 지역 안에는 공소 31개가 있으며, 현재의 성당 및 사제관은 1924년에 완성되었습니다.
성당의 주보성인 성당은 인민군 병원으로 그대로 남아있으며, 전쟁 관계로 월남한 성 베네딕도 수도회의 신부들은 1952년부터 가실성당을 위한 사목을 맡고있습니다.
가실성당에 속하고 있더거 본당이 된 곳은 모두 4개이며, 김천 황금동, 용평, 퇴강, 왜관이 있습니다.
1995년 100주년 사업으로 현재 성모당이 형성되었고 성당의 거룩한 분위기를 높이는 색유리화는 2002년에 설치되었고 2003년에 성당 및 구사제관은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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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실성당 기본 정보
주차시설 있음
지금까지 경북 칠곡 가볼만한곳 베스트10에 대한 소개였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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