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옥천 가볼만한곳 베스트10
안녕하세요? 이번 포스팅에서 소개드릴 내용은 충북 옥천 가볼만한 곳 베스트10에 대한 내용입니다.
아래 순위는 한국관광공사의 인기도 순위를 참고하여 추천드리는 내용입니다.
참고하시고 즐거운 여행 하시길 바랍니다.
정지용 생가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정지용 생가 소개
1996년에 원형대로 복원되어 관리되고 있는 정지용 생가는 구읍사거리에서 수북방향으로 청석교 건너에 위치합니다.
구읍사거리에서 수북방면으로 길을 잡아 청석교를 건너면 ‘향수'를 새겨 놓은 시비와 생가 안내판이 있는 곳에 이르게 됩니다.
이곳이 정지용 생가이며, 생가 앞 청석교 아래는 여전히 ‘향수'의 서두를 장식하는 실개천이 흐르고 있으며 그 모습은 변한지 오래이지만 흐르는 물은 예전과 같아 맑기만 하다.
정지용 생가는 방문을 항상 열어두어 찾는 이에게 그의 아버지가 한약방을 하였음을 가구(家具)로 알리고 있으며, 시선가는 곳 어디마다 정지용의 시를 걸어놓아 시를 음미할 수 있도록 배려해 놓았습니다.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소리 말을 달리고”,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않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향수'의 시어 따라 방안에 배치된 소품 질화로와 등잔은 자연스럽게 ‘향수'를 다시금 음미하게 하고 있습니다.
정지용 생가는 두개의 사립문이 있습니다.
하나면 족할 것을 두개씩이나 문을 낸 뜻은 방문객의 동선을 고려하여, 또는 한 개의 문으로 드나드는 번잡함을 피하기 위하여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또 생가의 원형 그대로 복원했습니다 하니 물레방아 쪽 사립문은 텃밭 드나드는 용도로 원래부터 있었는지도 모른다.
부엌 문 옆을 본다면 돌절구, 나무절구와 공이가 놓여있는 자리 언저리, 이곳이 정지용 생가임을 알리는 표시판을 또 하나 만날 수 있습니다.
이 표시판은 정지용의 모습과 함께 그의 태어난 년도, 날짜, 생가가 언제 허물어지고 다른 집이 지어졌다는 내용을 동판에 돋을새김하고 있습니다.
1988년 정지용의 해금조치가 있은 후 모임이 시작된 ‘지용회'가 생가가 복원되기 전 이곳 어디쯤에 그 자취만이라도 전하고자 붙여놓은 표시판을 기념삼아 다시 붙인 모양입니다.
‘지용회'가 정지용에 관한 것이면 무엇이든지 버리지 않고 아끼는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보통의 경우가 장독대는 뒤란에 위치하나, 정지용 생가의 장독대는 우물가 담장 밑에 다소곳하다.
우물 옆의 낮은 굴뚝도 눈여겨 볼일. 민가의 굴뚝은 그저 연기만 토해내면 그만이라 돌과 흙을 되는대로 쌓아 만들거나 깨진 항아리나 판자로 굴뚝을 만들어 뒤란에 두는 것이 보통이나, 어쩐지 이곳은 우물가 옆입니다.
낮은 굴뚝의 연기는 바로 흩어지지 않고 집 마당을 휘돌아 나가기 마련, 연기는 소독기능도 합니다하니 그 지혜의 소산이 아닌가 싶다.
* 정지용 생가의 유래 *
시인 정지용(鄭芝溶 1902~1950)은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 40-1번지에서 1902년 5월 15일(음력)에 태어났다.
정지용은 이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생가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옥천공립보통학교(현재의 죽향초등학교)에 다녔으며, 14살 때에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집을 떠나 객지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정지용의 본래 생가는 1974년에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다른 집이 들어섰으나, 1996년 7월 30일에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되었습니다.
시인 정지용이 일본에 유학갈 때 고향을 그리며 쓴 시로 1927년 《조선지광》에 발표하였습니다.
한가로운 고향의 정경을 통하여 한 폭의 풍경화처럼 생생하게 그려낸 그의 모더니즘 시의 대표작입니다.
우리들의 가슴에 새겨진 고향의 정경을 오롯하게 담아낸 정지용의 시 ‘향수'는 이동원, 박인수의 노래로 다시 태어나 더욱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정지용의문학이 살아 숨쉬는 곳]
* 정지용 문학관
정지용 생가 곁에 문을 열었으며, 정지용 문학의 실체를 보고, 느끼고, 감상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문학전시실과 영상실, 문학교실 등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 장계관광지(멋진 신세계)
멋진신세계는 정지용의 시정세계를 공간적으로 해석한 공공예술 프로젝트입니다.
정지용시인의 시문학을 테마로 하여 조성한 '멋진신세계'는 충북 옥천의 구읍에서 장계관광지를 잇는 아트벨트 30리길을 이르는 말입니다.
멋진 신세계가 있는 장계관광지를 방문하면 시문학을 온몸에 느낄 수 있습니다.
* 옥천 향수 100리 자전거길(금강코스)
금강이 굽이치는 대청호반의 아름다운 강변과 한국 현대시의 선구자 정지용 시인이 태어난 향수의 고장 옥천의 시문학을 함께 즐기며 여유와 느림이 있는 시골 풍경과 정겨움을 느끼며 달릴수 있는 자전거길입니다.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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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생가 기본 정보
홈페이지 http://www.oc.go.kr/jiyong/index.do
운영 시간 09:00~18:00
※ 생가와 문학관 동일
주차시설 주차 가능
쉬는 날 월요일, 1월 1일, 설날, 추석날
용암사(옥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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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암사(옥천) 소개
* 쌍삼층석탑으로 유명한, 용암사(옥천) *
용암사는 충북 옥천군의 장용산 중턱에 자리 잡아 울창한 숲과 오랜 멋을 자랑합니다.
용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法住寺)의 말사로 신라 때인 552년(진흥왕 13)에 의신(義信)이 세운 사찰입니다.
용암사에 있는 이 석탑은 일반적 가람배치와 달리 사방이 한눈에 바라다보이는 북쪽 낮은 봉우리에 자리잡고 있는데, 탑이나 건물을 세워 산천의 쇠퇴한 기운을 북돋아준다는 고려시대의 산천비보사상에 따라 건립된 것으로 보입니다.
* 용암사의 볼거리, 보물, 쌍삼층석탑 *
용암사에는 보물인 옥천 용암사 쌍삼층석탑과 용암사 마애불상이, 용암사 대성전에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남아있습니다.
쌍삼층석탑은 같은 모양의 석탑 2기가 자연 암반 위에 나란히 세워진 쌍탑으로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이 거의 체감 없이 비슷한 비율로 높게 서 있는 특이한 형태입니다.
이 탑은 여러 개의 화강암으로 만들었는데 이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리고 상륜부(相輪部)를 갖추고 있습니다.
동탑의 높이는 4.3m, 서탑의 높이는 4.1m 정도로 두 탑의 규모면에서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두 석탑 가운데 동탑은 대체로 완전하지만 서탑은 2층과 3층 탑신의 몸돌이 결실되어 다시 보수하였습니다.
이 석탑은 각 부분의 양식과 석재의 결구 수법에서 간략화된 조성 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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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암사(옥천) 기본 정보
운영 시간 일출~일몰
주차시설 있음 (주차장에서 사찰까지 도보로 30분 거리)
쉬는 날 연중무휴
금강유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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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유원지 소개
충북 옥천군 동이면 금강로 596에 자리한 금강유원지는 경부고속도로 휴게소로 유명하다.
휴게소 밑으로 펼쳐지는 강줄기가 유원지인 탓입니다.
휴게소가 세워지기 전부터 이 일대를 흐르는 금강 유역을 금강유원지라 불렀습니다.
휴게소와 인근 마을에 전력 공급을 책임지는 소수력발전소를 돌리기 위해 라바댐을 설치했는데 그 위로 푸른 강물이 넘실댄다.
밑으로는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나 있습니다.
잠수교라 불리는 다리 중간에 항상 물이 차 있어 건너갈 때 주의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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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유원지 기본 정보
청풍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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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정 소개
* 김옥균과 명월이의 이야기가 있는 곳, 청풍정 *
'청풍정'은 산수가 좋고 바람이 맑아 고려시대 때부터 선비들이 자주 찾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이곳은 조선말기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이 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청풍정에서 은둔생활을 하던 곳입니다.
물이 굽이쳐 흐르는 절벽 위에 정자 하나, 청풍정에는 김옥균과 명월이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개업식 연회를 기회로 김옥균은 박영효, 홍영식 등과 함께 사대당 거두들을 죽인 뒤 신정부를 조직하고 호조참판 겸 혜상공국당상이 되었으나 청나라가 군대를 보내 정변을 막는 바람에 삼일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정변에 실패한 김옥균이 이곳 청풍정에 내려와 은거했습니다.
이때 김옥균은 명월이라는 기생과 함께 청풍정으로 내려왔다고 전해진다.
정변에 실패한 후 김옥균은 청풍정에서 울분을 달래며 정치적 야망을 키우며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명월이가 절벽 아래 물로 떨어져 죽는 일이 발생합니다.
명월이는 짧은 글을 남기고 죽었는데 그 유서에는 ‘김옥균과 함께 소일하고 있던 세월이 일생에 영화를 누린 것 같이 행복했지만, 자기로 말미암아 선생이 품은 큰 뜻에 누를 끼칠까봐 몹시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고 합니다.
아침에 일어난 김옥균이 이 사실을 알고 시체를 거두어 장사를 치룬 뒤 청풍정 아래 바위 절벽에 ‘명월암’이라는 글자를 새겼다고 합니다.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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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정 기본 정보
옥천 후율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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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 후율당 소개
* 조선시대 사당의 모습 그대로, 후율당 *
충청북도 옥천군 안내면 도이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사당으로 1976년 12월 21일 충청북도기념물로 지정되었습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의병장인 조헌(趙憲:1544~1592)이 보은현감(報恩縣監)을 사임하고 옥천(沃川)에 낙향하여 살 때인 1588년(선조 21)에 지은 것입니다.
스승인 이이(李珥)를 경모하여 그의 뒤를 잇습니다는 뜻으로 자기 호를 이이의 호인 율곡(栗谷)에서 율자를 따서 후율(後栗)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리고 용촌 밤티〔栗峙〕에 당(堂)을 짓고 당의 이름을 후율당(後栗堂)이라고 하였습니다.
조헌은 본관은 배천(白川),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 도원(陶原) 또는 후율(後栗)이며, 시호는 문열(文烈)입니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에게서 배웠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후율당에서 의병을 일으켜 1,700여 명을 규합하여 영규대사(靈圭大師)의 승병(僧兵)과 함께 청주를 수복하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후 금산싸움에서 700명의 의병과 함께 순국하였습니다.
후율당도 임진왜란 후 퇴락(頹落)되어 가던 것을 1854년(철종 5) 후손들이 옥천군 백양동에 이건(移建)하였습니다, 1864년(고종 1) 현 위치로 옮겼으며, 1977년 중건(重建)하였습니다.
* 후율당 내에 있는 유물 및 유산 *
후율당 내에는 1621년(광해군 13)에 판간한 항의신편(抗義新篇) 판목(板木) 125장와 유림시판(儒林詩板) 10장, 선조가 내렸다는 조서(詔書) 1장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또한, 경내(境內)에는 금산(錦山)에서 그를 대신하여 죽으려 했던 아들 완기(完基)의 효자각(孝子閣)이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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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 후율당 기본 정보
옥천 이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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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 이지당 소개
충청북도 옥천군 군북면 이백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서당으로 2020년 12월28일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중엽 옥천읍 옥각리에 사는 금(金), 이(李), 조(趙), 안(安)의 4문중이 합작해서 세운 서당입니다.
당초에는 각신동(覺新洞)이라는 마을 앞에 있었으므로 각신서당(覺新書堂)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후학을 가르쳤던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조헌(趙憲:1544~1592)의 친필로 된 ‘각신서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조헌은 본관은 배천(白川),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 도원(陶原) 또는 후율(後栗)이며, 시호는 문열(文烈)입니다.
이이의 문인 가운데서도 뛰어난 학자로,〈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여 이이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켰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1,700여 명을 규합하여 영규대사(靈圭大師)의 승병(僧兵)과 함께 청주(淸州)를 수복하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후 금산싸움에서 700명의 의병과 함께 순국하였습니다.
* 이지당의 유래 *
각신서당은 후에 송시열(宋時烈)이 《시전(詩傳)》에 있는 ‘고산앙지 경행행지(高山仰止 景行行止)’, 즉 ‘산이 높으면 우러러 보지 않을 수 없고 큰 행실은 그칠 수 없다’ 라는 뜻의 문구에서 끝의 ‘지(止)’자를 따서 이지당(二止堂)이라고 고쳐 불렀습니다.
후 퇴락된 것을 1901년(광무 5) 이 서당을 세웠던 4문중에서 재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재 서당 건물은 목조 6칸의 강당과 누각으로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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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 이지당 기본 정보
대성사(옥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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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사(옥천) 소개
대성사는 충북 옥천군 옥천읍 교동리에 위치하고 있는 한국불교 태고종에 소속되어 있는 사찰입니다.
일반적인 사찰의 경우 초하루, 보름에 법회가 열리지만 대성사에서는 매주 일요일마다 법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이 법회에는 주변의 불자들도 참여하지만 전국에서 찾아온 수많은 선남선녀들이 대웅전을 가득 메우게 됩니다.
다른 사찰에서 보기 드문 광경입니다.
대성사 주지인 혜철 스님의 남다른 노력에 의한 결과다.
어떤 사찰은 참선을 위한 도량으로 외부와 격리된 채 존재하기도 하지만 대성사는 참선과 더불어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노력의 하나로 사찰 홈페이지에 중매카페를 개설했습니다.
결혼 적령기를 넘기고도 마땅한 연결고리가 없어 결혼 상대를 찾지 못하는 불자가족들이 의외로 많다는 데 착안해 만든 카페였다.
이 결과 많은 선남선녀들이 인연을 찾게 되었고, 서로의 인연을 찾지 못했습니다 하더라도 그들의 삶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에는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대성사의 혜철스님은 인연을 맺어주는 만남 주선 이외에도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한 여러 일들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수시로 교도소, 경찰서, 군부대 등 다양한 곳을 찾아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 더 많은 이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를 것을 설파하기도 하며, '대중과의 만남'을 주제로 산사음악회를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3회 산사음악회는 종교간의 이해와 화합을 위해 천주교 옥천성당과 공동으로 진행해 옥천군의 축제의 장을 마련해 주목을 받은 바 있습니다.
또한, 불교의식을 대중문화로 승화시키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유등축제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유등축제는 옥천 주변의 대청호에서 개최하는데 축제가 벌어지는 날에는 화려한 법등과 호수에 비춰지는 그림자가 어우러져 일대의 장관을 이룬다고합니다.
많은 옥천군민들에게 하나의 즐거운 축제를 선사한 것이며, 이는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한 대성사의 신념을 잘 보여준다 할 수 있습니다.
* 대성사의 볼거리 *
사찰에는 대웅보전·범종각·요사 2동의 건물이 있고, 미륵불상·5층석탑을 비롯해 사적비·공덕비·공로비 등의 석물이 있습니다.
1979년 건립된 대웅보전은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익공식 공포를 구성했으며 내부 천장은 빗천장과 더불어 우물천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2층 구조로 겹처마 사모지붕의 건물인 범종각은 대성사의 정문 역할을 하고 있으며 아래층에는 통로 양편에 부조로 조각한 사천왕상이, 위층에는 1987년 제작한 범종이 있습니다.
범종각을 지나 경내로 진입하면 왼편으로 요사 건물이 있고, 정면의 낮은 석축을 따라 오르면 1972년 조상한 미륵불 입상과 1982년 조성한 5층석탑(금강보탑), 대성사 사적비, 대성사 금강보탑 건립 공덕비, 공로비 등이 대웅전 앞쪽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대성사(옥천) 기본 정보
옥천 독락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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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 독락정 소개
* 선비들이 즐겨모이던 공간, 독락정 *
충청북도 옥천군 안남면(安南面) 연주리(蓮舟里)에 있는 주몽득(周夢得)이 세운 조선 중기의 정자로 1998년 6월 26일 충청북도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습니다.
절충장군중추부사를 지낸 주몽득이 1607년(선조 40)에 세운 정자로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으로 방 1칸과 마루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정자로 지었지만 후에 유생들이 학문을 닦고 연구하는 전당으로 사용하여 서원 구실을 하였습니다.
1772년에 중수하고 1888년, 1923년 두 차례에 걸쳐 보수하여 보전해오다가 1965년 초계주씨독락옹파 문중에서 보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 금강과 병풍의 바위산의 어우러짐 *
건물 앞쪽에는 1668년 당시 군수였던 심후(沈候)의 ‘독락정(獨樂亭)’이란 액자가 걸려 있고, 대청에는 입재(立齋) 송근수(宋近洙)의 ‘율시기문(律詩記文)’이 각자되어 걸려 있습니다.
이 정자로 인해 마을 이름도 독락정(獨樂亭)이라고 부른다.
정자 뒤쪽에는 층암절벽 바위산이 병풍처럼 솟아 있고, 앞쪽에는 금강(錦江)이 흐르고 산들은 용이 춤을 추며 승천하는 기세로 선비들이 즐겨 모이던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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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 독락정 기본 정보
높은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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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벌 소개
'높은벌' 혹은 '높은벼루'라고 불리는 고당리가 그 곳에 있었습니다.
모두 10가구가 남아 있는 높은벌 마을. 마을에서 금강이 저 아래 보입니다.
방금 지나온, 까마득하게 높아 보이던 다리가 눈 아래에 있습니다.
산골짜기에 밭을 일구며 사는 마을. 이 마을에서 유명한 건 옻입니다.
마을 뒷산에 옻나무와 참가죽나무가 아직도 많다.
해마다 봄이면 옻 새순을 따서 큰 시장에 내다 판다.
참가죽나무의 순도 밥상에 오르는 진귀한 나물 반찬이라서 심심치 않게 팔린다.
몇 해 걸러 한 번씩 옻나무 진액과 옻나무 껍질도 내다 판다.
한때 이 마을에 옻나무가 많다는 게 알려져 매년 봄에 외지 사람들이 찾아오곤 했었는데 옻에 민감한 몇몇 사람이 옻이 올라 고생한 적도 있습니다고 합니다.
마을이 고속도로에서 빤히 보이는 곳에 있어서 고속도로 개통과 함께 초가 지붕을 다 걷어내고 새마을 지붕을 얹었는데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오지라는 게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얽힌 과거로의 여행이라면 '높은벌' 또한 오지라 할 수 있겠다.
높은벌은 작고, 오지에 가까운 마을입니다.
그러다보니 특별한 관광 편의 시설은 없다.
하지만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에서 내려다보는 금강 풍경이 아주 멋있습니다.
오르막길 입구부터 마을까지 걸어 올라가는 10~20분 정도의 시간과 마을 내를 돌아보는 시간 20분 정도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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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벌 기본 정보
안터선사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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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터선사공원 소개
안터선사공원은 옥천의 선사시대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곳입니다.
안터선사공원에는 고인돌 1기, 선돌 1기가 있습니다.
석탄리 고인돌은 안터마을에 있던 3기의 고인돌 중 1977년 충북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한 안터1호 고인돌입니다.
덮개돌이 거북 모양이며, 판돌 4매를 짜 맞춰 무덤방을 지상에 축조한 탁자식 고인돌입니다.
발굴 당시 X 모양을 새긴 돌, 얼굴 모양의 예술품, 가락바퀴, 그물추 등이 출토되어 고인돌에 묻힌 이가 여자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고인돌과 짝을 이루는 선돌은 아랫부분에 쪼으기 수법으로 지름 90cm의 원을 새겨 전체적으로 임신한 여성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안터1호 고인돌에 묻힌 사람을 나타내는 기념비적 기능과 무덤 수호의 기능을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고인돌과 같은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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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터선사공원 기본 정보
지금까지 충북 옥천 가볼만한곳 베스트10에 대한 소개였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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