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광산 가볼만한곳 베스트10
안녕하세요? 이번 포스팅에서 소개드릴 내용은 광주 광산 가볼만한 곳 베스트10에 대한 내용입니다.
아래 순위는 한국관광공사의 인기도 순위를 참고하여 추천드리는 내용입니다.
참고하시고 즐거운 여행 하시길 바랍니다.
송산유원지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송산유원지 소개
오랜 세월 동안 원시적인 상태로 남아 있던 황룡강(黃龍江)의 섬을 송산유원지으로 조성하였습니다.
송정리 영광통에서 영광방면으로 약 5km 남짓을 가다보면 황룡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보입니다.
다리를 건너기 직전에 우회전을 하여 박호동 가는 길로 들어서서 2000여 미터를 더 가면 커다란 강 한 가운데 떠있는 섬 공원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섬은 전체가 공원입니다.
섬의 면적은 3만 9,277㎡입니다.
강은 어등산이 감싸고 섬은 황룡강이 감싸안아 시원스럽고 아름답다.
1만 2천여평의 잔디광장, 그 광장을 둘러산 산책로, 산책로를 따라 조성된 60여개의 단지와 가로등, 씨름장, 아득히 보이는 섬의 북쪽 끝에 있는 6개의 돌탑들이 있습니다.
청등보 바로아래 강 한가운데 만들어진 2개의 물놀이장은 수십 명이 한꺼번에 들어가 수영을 해도 넉넉할 크기다.
보의 한가운데서 섬으로 들어가면 입구의 왼쪽엔 커다란 연못이 오른쪽엔 100여그루의 자연목이 우거진 그늘아래 약 1천여 평에 달하는 캠프장이 있습니다.
섬을 빙둘러 만들어진 700여m의 산책로를 걸으면 왼쪽엔 조성된 갖가지 야생화들이 줄을 잇고, 오른쪽으로는 검푸른 수초들이 물과 함께 떠 있어 마치 공원과 시골 강가를 동시에 걷고 있는 느낌을 준다.
수 억 년을 세월과 함께 흐르며 강은 상류의 모래와 흙을 한줌한줌 날라다 쌓고 또 쌓아 섬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지난 수 천 년 동안 원시적으로 남아있던 이 섬은 이제 자연과 어우러져 수려하면서도 아름다운 공원이 되어 우리에게 휴식처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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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산유원지 기본 정보
쌍암공원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쌍암공원 소개
* 호수와 여유, 그리고 쉼이 있는 공간, 쌍암공원 *
쌍암공원은 광산구 첨단지구 내 광주과학기술원 앞에 위치해 있습니다.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호수 때문에 운치를 더하고 있어, 일명 호수공원으로도 불리기도 합니다.
호수주변을 따라 잘 조성된 철쭉꽃 숲들과 소나무숲이 있고 하늘을 향해 내뿜는 부유폭기는 상쾌함과 시원함을 더해준다.
한 달에 한두 번은 도심 속의 작은 예술축제 등 이벤트행사가 열려 분위기를 한껏 돋군다.
호수 속에서는 시커먼 물고기 떼가 오는 이를 반기고 듬성듬성 조화를 이룬 물풀들은 자연미를 한껏 더해준다.
유럽의 여느 공원의 가로등 같이 우아하고 고전미 넘치는 96개의 가로등은 밤의 광원을 환상으로 물들입니다.
* 가족공원으로 자리 잡은 쌍암공원 *
146개의 벤치, 깨끗하고 정갈한 화장실3개소 등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는 쌍암공원에는 어린이들을 위한 조합놀이대 3개소 등이 갖추어져 있어 가족 단위의 공원으로 좋다.
또한 축구장과 농구장, 족구나 피구를 즐길 수 있는 드넓은 잔디광장, 체력단련시설 등이 갖추어져 청소년들에게도 인기가 많다.
혹시나 모를 안전사고도 4명의 관리요원이 상주하여 시민불편을 없애주고 있습니다.
광산구에서는 주민들의 편의와 쾌적한 공간조성을 위해 왕벗나무 240본을 식재하였으며, 팔각정, 화장실 각1개소와 파고다지붕 18개소를 설치했습니다.
또한 편리한 음용수 공급을 위해 음수전 3개소를 설치 할 예정이어서 앞으로는 더욱 시민들의 쉼터로 자리 잡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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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암공원 기본 정보
송정공원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송정공원 소개
송정 주민과 광산 구민의 휴식 공간인 송정공원은 금봉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희생을 추모하기 위한 현충탑과 용아 박용철 시인의 시비, 국창 임방울 선생의 기념비, 의병대장 금제 이기손 장군의 의적비, 이밖에도 많은 충혼비가 설치되어있습니다.
또한 지역 주민의 지식의 산실이 되고 있는 송정 도서관이 있으며, 노인당도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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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송정공원 기본 정보
신창동 선사유적지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신창동 선사유적지 소개
* 철기 시대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주요 유물 *
신창동 선사유적지는 영산강 유역의 충적대지와 낮은 구릉지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유적의 북쪽 1.5km에 월계동 장고분(기념물)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초기 철기시대(기원전 2~1세기)의 늪과 못 터, 토기 가마터, 배수 시설, 집자리, 독무덤 등 고대 농경 생활과 관련된 유적이 집중된 곳입니다.
독무덤은 토착 농경민의 어린이 무덤으로 유적의 서쪽 구릉 경사 면에 53기가 분포하고 있습니다.
독의 기본 형태는 평저난형(平底卵形)으로, 축약된 구연 등은 무문토기의 가장 보편적 형식입니다.
출토 유물은 무문토기와 평저장경호(平底長經壺) 등의 토기류, 청동제 칼자루장식, 돌도끼, 돌화살촉, 땅파는 도구로 추정되는 철제편 등이 있습니다.
늪과 못터는 영산강의 범람에 의하여 형성된 것으로, 모두 10개 층으로 나누어지거나 크게 3개 단위로 구성됩니다.
출토 유물은 빗 괭이, 나무뚜껑, 굽다리 접시, 검은 간토기 등 목재류(木材類), 토기류(土器類), 칠기류(漆器類), 석기류(石器類)와 탄화미 (炭化米), 탄화맥 (炭化麥), 볍씨, 살구씨, 호도씨, 오이씨 등의 씨앗류, 민물 조개류, 물고기뼈, 짐승뼈 등이 있습니다.
* 철기시대의 토기 연구에 의의가 있는 토기 가마 *
토기 가마는 지반(地盤)인 황갈색 석비례층을 파고 만들었으며 가마바닥은 U자형으로 5∼8도의 경사를 이루고 있습니다.
출토 유물은점토대(粘土帶)토기, 검은간 토기, 대접, 두형(豆形)토기, 굽다리 접시, 시루, 옹형(擁形)토기 등의 토기류와 철도자(鐵刀子) 1점 등이 있습니다.
구상유구(溝狀遺構)는 토기 가마 북쪽에 있는 두줄이 평행한 도랑과 같은 유구입니다.
석비례 암반층을 파고 상.하 2단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유구 안쪽은 V 또는 U자형입니다.
출토 유물은 점토대토기, 옹형 토기, 컵형 토기, 토기 뚜껑, 가락 바퀴 등이 있습니다.
조상유구(條狀遺構)는 모두 5조로 너비 10∼25cm의 길다란 모래띠가 40∼70cm의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서쪽으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장축 방향은 남북이며 교란되어 유구의 형태가 분명하지 않다.
무문토기 3점이 출토되었습니다.
* 농경 생활의 발견과 전파 경로 연구에 중요한 자료 *
집자리는 장방형 움집으로 석비례 암반층을 파고 만들었으며 일부 유실 되었습니다.
바닥의 중앙부는 진흙을 불에 구워 다졌으며 타원형의 화덕을 설치하였습니다.
장축 방향은 남북이며 길이 430cm, 너비320cm, 깊이20cm 입니다.
유물은 화덕자리 근처에서 연질원저단경호(軟質圓低短涇壺)와 포탄형의 타날문(打捺文)토기가 북쪽 벽가에서 적갈색 연질토기와 함께 출토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유적 유물은 당시의 생산과 유통, 매장 유적의 일부를 엿볼 수 있어, 이 시기 생활양식과 농경 생활의 발전, 전파 경로 등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입니다.
* 규모 - 250.086㎡
* 시대 - 초기 철기시대
* 소유자 - 국유 외 사유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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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창동 선사유적지 기본 정보
월계동 장고분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월계동 장고분 소개
월계동 장고분은 영산강 상류의 낮은 구릉지대에 있는 장구촌마을에 있으며, 발달된 방부(方部)와 방패형 주호(周濠), 나팔형 토기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발달된 방부(方部)와 방패현 주호(周濠), 크게 벌어진 나팔형 토기 등이 특징으로 옛 무덤 발달사 연구에 중요한 유적입니다.
또한 일본의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 기원과 관련하여 고대 한일관계사를 밝히는데도 많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광주 첨단산업기지 조성 계획에 의하여 전남대학교 박물관에서 1993년과 1995년 두차례 발굴조사를 실시하였습니다.
1호분은 일제강점기 시대에 도굴되었으며 봉토가 깍여 단애면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복원된 봉분의 전체 길이는 45.3m, 높이 2.8∼6.1m이며, 주호는 너비 14.2m∼5.5m 깊이는 1.5m 내외입니다.
봉분은 몇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동시에 판축 성토되었으며, 장축 방향은 원부가 동남동에 방부가 서북서에 있습니다.
널길이 있는 횡혈식(橫穴式) 석실로 원부의 한쪽에 치우쳐 원부와 함께 축조 되었습니다.
석실의 방향은 널방이 동북동, 널길이 서남서에 있습니다.
석실벽은 할석(割石)을 벽돌처럼 쌓고 판석으로 천장을 덮었으며, 바닥은 큰 할석을 깐 다음 맨 위에 강자갈을 깔고 석관을 설치 하였습니다.
석실의 크기는 널방 길이4.5m, 너비2.8m, 높이2.7m이며, 널길은 현길이 2.8m, 너비 1.4m, 높이 1.6m 내외입니다.
석실 내부는 도굴되었으나 귀고리 1점, 철제 화살촉 1점, 토기편 등 약간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주호에는 적갈색 원통형 토기, 나팔형 토기, 유공광구호(有孔廣口壺) 등의 많은 토기들이 파괴된 채 출토되었습니다.
경작과 도굴로 많은 부분이 유실되어 원부 정상에는 판석 일부가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복원된 봉분의 전체 길이 34.5m, 높이1.5m∼3.5m이며, 주호는 너비 4.5m∼8.5m, 깊이 1m 내외입니다.
봉분은 몇 개로 나누어 판축하였으며 방부를 원부에 붙여 축조하였습니다.
장축 방향은 원부가 동쪽에, 방부가 서쪽에 있습니다.
횡혈식 석실로 원부와 동시에 축조되었습니다.
장축 방향은 널방이 동남쪽, 널길이 서북쪽에 있습니다.
석실벽은 할석을 벽돌처럼 쌓았으나 일부 장대석을 사용한 곳도 있습니다.
바닥은 1겹의 판석을 깔았습니다.
석실의 크기는 널방 길이 3.8m, 너비 2.4m, 현 높이 1m내외이며 널길은 파괴되어 현 길이 2.5m, 너비1.5m만 남아 있습니다.
도굴과 봉분의 유실로 인하여 석실에서는 철도자편(鐵刀子片), 토기편, 유리구슬만이 출토되었습니다.
주호 시설에는 적갈색 원통형토기 등이 파괴된 채 출토되었습니다.
* 소유자 - 광주광역시청
* 수량 - 2 기
* 시대 - 삼국시대(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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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계동 장고분 기본 정보
용아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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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아생가 소개
이 곳은 우리나라 현대 문학의 개척자 중 한 사람으로 초창기 시단을 빛낸 시인 용아 박용철(1904∼1938) 선생의 생가입니다.
선생은 이곳에서 새로운 문명을 소개하고 자주독립 정신을 일깨워 주기도 하였습니다.
용아의 생가는 1970년대 새마을 사업으로 초가지붕을 시멘트 기와와 슬레이트 등으로 개량하였으나 1995년 문화재 복원 사업을 실시, 다시 초가지붕으로 복원하여 관리하고 있습니다.
본채와 사랑채, 행랑채, 사당, 서재 등이 남아 있습니다.
본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높다란 막돌 기단 위에 세웠다.
왼쪽은 부엌이며, 중앙 2칸은 방인데, 4개로 나누어 열리는 문을 갖고 있습니다.
나머지 2칸은 2개로 열리는 정자 살문입니다.
사랑채도 5칸인데 오른쪽부터 부엌, 방, 마루의 차례로 되어 있습니다.
사당은 정면 3칸 , 측면 1칸의 맞배지붕입니다.
행랑채는 4칸으로 사랑채로 들어가는 대문이 있습니다.
이 집은 용아의 고조부가 지었습니다고 전해지나 19세기 후반에 지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박용철 선생은 광주 공립 보통학교와 서울의 배재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동경 청산학원에서 공부하면서 김영랑과 사귀게 되었습니다.
졸업 후 다시 외국어학교 독문과에서 수학한 후 연희전문학교를 수학하고 고향에 돌아와 문학활동에 전념하였습니다.
김영랑, 정지용, 정인보, 변영로 등과 문학 동인으로 활동하였으며, 1930년 「문예월간」을 창간하여 외국문학을 소개하였습니다.
1931년에는 김영랑, 정지용 등과 함께 순수시 전문지인 「시문학」을 발간하여 창간호에 대표작인 「떠나가는 배」「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등을 발간하였고, 극예술연구회의 동인으로 신극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해외 시의 이론을 번역하여 소개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무렵 문단은 프로문학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나, 그는 김영랑 등과 함께 순수시 운동을 펼쳤다.
정렬적이고 남성적인 그의 시세계는 30년대 서정시 발전에 선구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선생이 시를 통하여 마음을 가다듬어 곱게 바치려 한 것은 티끌없이 향 맑은 시혼의 순정 세계였다.
그러나 그는 1938년 35세의 젊은 나이에 병사하였습니다.
1939년 「박용철 전집」을 간행하였는데, 서두에는 그의 대표작 「떠나가는 배」가 실려 있습니다.
후에 그의 아름다운 시 정신을 기리기 위해 후배들이 광주 공원에 시비를 세워 기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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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아생가 기본 정보
무양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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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양서원 소개
무양서원 (武陽書院)은 고려 인종(재위 1122∼1146) 때 어의(御醫)이면서 명신인 장경공 최사전을 중심으로 그의 후손 4명(손암 최윤덕, 금남 최부, 문절공 유희춘, 충열공 나덕헌)을 모시고 있는 서원입니다.
최사전은 의술로써 벼슬에 나갔는데 왕의 총애를 받아 높은 벼슬에 오른 사람입니다.
무양서원은 1927년에 탐진 최씨 문중이 전국 유림의 호응을 얻어서 세운 서원입니다.
서원의 이름은 광주의 옛 지명에서 따 왔다고 하는데, 강당인 이택당을 중심으로 왼편과 오른편에 합의문과 합인문이 있습니다.
합의문을 지나면 오른편에 동재인 성지재가 있고 왼편에는 서재인 낙호재가 있습니다.
또한 높은 땅 위에 담장이 있는 무양사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것은 사당 안에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원래 서원은 제사 기능과 교육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탐진 최씨 문중에서는 1945년 광산구 쌍암동에 무양중학교를 설립하여 지금까지 교육기관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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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양서원 기본 정보
풍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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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영정 소개
* 강변과 어우려져 경관을 만드는 곳, 풍영정 *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 선창산(仙滄山)과 극락강(極樂江)이 마주치는 강변의 대지 위에 있습니다.
광주와 광산 일대에 있는 100여 개의 정각 중 대표적인 것입니다.
풍영정은 명종 15년(1560년) 승문원(承文院) 판교를 끝으로 관직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온 김언거(金彦据)가 지은 정자입니다.
여기서 그는 72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10여년 동안을 김인후(金麟厚), 이황(李滉), 기대승(奇大升) 등 이름난 문인들과 교우하며 지냈다.
풍영정에 남아 있는 이들의 제영현판(題詠懸板)은 이때의 흔적입니다.
또한, 여기에는 〈제일호산(第一湖山)〉이라는 편액(扁額)도 걸려 있는데, 이는 명필 한석봉(韓石奉)이 쓴 것입니다.
김언거(1503∼1584)의 본관은 광산, 자는 계진(季珍), 호는 칠계(漆溪)입니다.
김정(金禎)의 셋째 아들로, 1525년(중종 20) 사마시(司馬試), 1531년 문과에 급제한 뒤 옥당(玉堂)에 뽑혀 교리(校理)·응교(應校)·봉사시정(奉史侍正) 등의 내직(內職)을 거쳐 상주(尙州)·연안(延安) 등의 군수를 지냈다.
승문원 판교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왔다.
* 풍영정에 얽힌 전설 *
김언거는 덕망이 높아 낙향을 하자 그를 아끼던 사람들이 12채나 되는 정각을 지었습니다고 합니다.
하지만 풍영정 이외의 11채의 정각들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습니다.
풍영정만 소실을 면한 데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습니다.
다른 정자들이 다 타버리고 풍영정이 불길에 휩싸이자 현판 글자 가운데 앞의 풍〉자가 오리로 변하여 극락강 위로 날아올랐다.
기이하게 느낀 왜장이 즉시 불을 끄도록 하자 극락강의 오리가 현판에 날아들어 다시 글씨가 또렷이 되살아났다.
현재 정각에 걸린 현판의 글자를 자세히 살펴보면 풍자와 영정의 글씨체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이 이 전설이 생겨난 까닭이 아닌가 여겨진다.
* 소유자 - 광산 김씨 문중
* 규모 - 정면 3 칸, 측면 2 칸, 골기와 팔작지붕
* 시대 -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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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영정 기본 정보
호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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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가정 소개
* 설강 유사가 지은 정자, 호가정 *
호가정은 조선 중·명종대의 문신 설강 유사(雪江柳泗)(1502~1571)가 만년에 지은 정자입니다.
호가정이라는 이름은 송나라 소강절이 말한 호가지의(浩歌之意)에 담긴 뜻을 취하여 지었습니다.
이 정자는 1558년(명종 13) 처음 세웠으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불타 없어져, 1871년(고종 8년)에 다시 세웠다.
그 후 1932년과 1956년 중수하였습니다.
정자는 정·측면이 다같이 3칸인 골기와 팔작지붕의 건물로, 당초에는 중앙에 거실을 두었으나 중수할 때 이를 없애고 전부 우물마루로 고쳤다.
사방좌우 모서리에는 1칸씩의 낮은 난간을 두었습니다.
사방중앙칸의 가운데는 댓돌을 두어 출입에 편리하도록 하였습니다.
호가정이 위치한 노평산 기슭은 앞에 극락강과 황룡강이 합류하여 경관이 빼어난 곳입니다.
이곳에는 호가정 현판을 비롯하여 설강의 호가정기와 노사 기정진의 호가정 중건기, 후손 유보한의 호가정 중수기, 호가정원운, 근차설강정운, 근차판상운등과 오겸, 이안눌, 김성원 등이 누정제영(樓亭題詠)을 새긴 편액이 걸려다.
* 설강 유사에 대하여 *
설강 유서는 중종 23년(1528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무장현감, 전라도사, 종성부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나, 권신 이량의 모함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이곳으로 낙향하였습니다.
당대의 명유인 이황, 이언적, 오겸 등과 교분을 가졌고, 사위로 맞이한 김성원과 후대의 이안눌 등이 그의 시를 즐겨 차운 하였습니다.
광주 경렬사에 배향되었으며 '설강유고집'(雪江遺稿集)과 '위친필봉제축유서'(爲親筆奉祭祝遺書)가 전합니다.
[문화재 정보]
지정종목 :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지정연도 : 1990년 11월 15일
시대 : 조선
종류 : 정자
규모 : 정면 3칸, 측면 3칸, 골기와 팔작지붕
이미지 출처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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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가정 기본 정보
쉬는 날 연중무휴
양송천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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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송천묘역 소개
* 정철의 스승, 양송천 묘역 *
송천 양응정의 묘역으로 현재 제주 양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묘역에는 1581년(선조 14) 유림들이 세운 묘비와 석물이 있는데 정교하고 고풍이 역연하다.
또 이곳에는 양응정의 아들이며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충민공 양산숙의 묘와 양응정의 손자인 한림학사(翰林學士) 양만용(梁曼容)의 묘가 있습니다.
조선 조 명종~선조 때의 문장가이자 문신인 송천 양응정의 선비정신을 기리기 위해 그 묘역을 기념물로 지정하였으며, 산 아래(동호동 46)에 제각(祭閣)이 있고 묘 앞에 민병승이 찬(撰)한 신도비(神道碑)가 있으며 묘제일은 음력 10월 10일입니다.
* 선비정신을 보여주는 송천 양응정 *
양응정(1519∼1581)은 字(자)가 공변, 호가 송천으로 홍문관 교리인 학포 양팽손의 아들입니다.
1540년(중종35) 생원시에 장원하고 1552년 문과에 합격하여 홍문정자에 벼슬길에 나간 뒤 홍문관부수찬, 예문관봉교를 거쳐 수찬(修撰)에 올랐다.
이어 사간원, 사헌부, 공조, 예조, 병조를 두루 거쳤으나 당시부터 싹 트기 시작한 당쟁의 희생이 되어 박산(광산구 박호동)마을로 낙향하여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습니다.
조정에서는 송천의 재주와 학문을 아까워하여 다시 불러들여 홍문관수찬, 교리, 응교(應敎)와 예문관봉교와 응교, 세자대강원 보덕(世子待講院 輔德), 사간원 사간을 역임했습니다.
이어 홍문관 부제학(副提學), 승정원 좌우승지(左右承旨), 성문관 대사성을 지냈으며, 사간원 대사간, 사조참의를 거쳤으나 여러 차례 모함에 걸려 광주 진주 목사직과 경주부윤, 의주목사 등 외직으로 옮겨 다니기도 했습니다.
송천은 제자 정철에게 「나는 글로 헛이름을 얻어 자칫하면 비방거리가 되는데 이것은 유자(儒者)의 수치」라면서 「그대들은 행여 문장가가 되려하지 말라」고 타일렀습니다.
또 문장가로 이름 높았던 백광성, 홍연(洪蓮) 등의 제자들에게 「궁리의 뿌리 없이 먼저 문자에 능한 자는 있을 수 없다.
나 역시 늦게나마 그것을 깨닫고 후회하고 있으나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글 잘 쓴다고 깊은 사상없이 함부로 붓을 날리는 일이 없도록 당부한 말로서 오늘날에도 절실히 요구되는 훌륭한 가르침입니다.
송천은 그 자녀들의 교육도 훌륭하여 「크게는 삼강오상(三綱五常)에서부터 작게는 일사일물(一事一物)까지도 모두 나 자신에게 갖추어진 것으로 수행의 길에는 남녀의 다름이 없다」고 하고 충신, 신독(愼獨), 무자기(無自欺)야말로 학문의 요체이며, 주자의 말대로 「만사불구충효외(萬事不求忠孝外)」라는 말로 자주 깨우쳐 주었습니다.
이러한 가정교육이 있었기에 훗날 임난때 그 자녀들의 충효열삼강(忠孝烈 三綱)의 본이 세워졌으니 그 자녀들의 애국충절을 위한 고난의 자취는 양씨 삼강문에 정려(旌閭)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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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송천묘역 기본 정보
홈페이지 https://www.gwangsan.go.kr/culture/index.php
http://www.cha.go.kr
주차시설 없음
쉬는 날 연중무휴
지금까지 광주 광산 가볼만한곳 베스트10에 대한 소개였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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